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고교쿠 덴노 (문단 편집) == 백제부흥운동 원조의 특징 == 병력 파병을 위해 가장 심혈을 기울였던 것이 배였는데, 당시 배를 만들도록 명령이 내려진 스루가국은 무려 '''1,000척'''을 만들었다고 한다. 당대 스루가국은 배를 만들 수 있는 질 좋은 목재들이 풍부했고, 항해 기술이 뛰어난 자들도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경력 40년의 일본 고선박 전문가 곤도 유이치로는 7세기에 1,000척은 불가능하다고 평했는데, 당시에는 대략 배 한 척당 조선 기술자 6명에 잡부 4명, 총 10명이 2년간 매달려야 했기 때문에 1,000척의 배를 만든다는 것은 필요한 인력과 물자를 가늠하기 어려울 정도의 대역사였음을 알 수 있다. 후쿠오카로 가는 도중에 지나친 기비 일대(현 오카야마)에는 '우라'라는 사람을 섬기는 신사가 있다. 이 신사에는 >“(가마솥 밑에 우라의 목을 묻었는데,) 우라(溫羅)가 매일 꿈에 나와서 사랑하던 아조메라는 여인에게 밥을 짓게 하라고 했는데. 만일 불길한 일이 있으려면 가마의 밥이 거칠어지고, 좋은 징조일 경우에는 밥에 윤기가 날 거다." 라고 한 전설이 있다. 우라가 세운 키노조 성은 이 일대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데, 우선 토성을 쌓은 뒤 돌을 바깥에 둘러서 강화시키는 양식으로 일본이 아니라 백제의 마지막 수도인 사비(부여)의 나성과 같은 구조로 되어 있다. 지역 사람들은 우라를 백제 왕자로 알고 있으며, 일본인들에게는 폭군으로 불렸다고 한다. 우라의 세력이 미쳤던 기비의 이만이라는 마을은 663년 [[덴지 덴노]]가 병사를 모집한 곳이었는데, 이곳에 20,000명의 병사가 모였다고 하여 '이만'이라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기비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철 생산지였는데, 백제인들이 대거 기비로 도래하면서 철 생산 기술이 비약적으로 발전했다. 그 때문에 당대 야마토인들은 '마가네후쿠 키비'(최고의 철을 만드는 기비)라고 불렀다. 바로 산 너머에는 도기를 굽는 일족이 있었고, 북쪽으로 산을 넘으면 철을 만드는 그룹이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을 자기 세력권으로 끌어모아 힘을 얻은 호족의 무덤으로 일본에서 네 번째로 큰 고분인 야타오츠카 고분은 전형적인 백제의 굴식 돌방 무덤이다. 즉 기비에서 모여 백강 전투에 참전한 20,000명의 군대는 백제 도래인들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외에도 시가, 히로시마, [[시코쿠]]의 에히메, [[규슈]]의 후쿠오카와 구마모토 쪽에서도 가세했다. 이쪽 일대 또한 [[도래인]]들이 주로 살던 곳이었다. 백강 전투에 히로시마 일대인 미타니의 수령이 참가했는데, 무사생환하면 이곳에 절을 세우겠다고 했고, 결국 홍제(弘濟)라는 승려와 함께 귀환해서 절을 세웠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